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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 시리즈의 빈곳 채우기

 

 

1. 굿모닝

 

최불암이 손자랑 놀고 있었다. 

손자: 굿모닝~

최불암: 그게 뭔 뜻이냐?

손자: 영어로 "안녕하세요"라는 거예요.

그걸 듣고 흐뭇해진 최불암 부엌으로 가서 김혜자한테 자랑하고 싶어졌다.

최불암: 굿모닝~

김혜자: 시래기국이유.

 

 

 

 크고 넓은 거실이 있다. 옅은 녹색과 노란색이 섞인 흰 빛의 벽지에 손을 대면 어렴풋이 오톨도톨한 꽃무늬의 질감이 느껴진다. 나무 무늬를 본뜬 바닥은 먼지가 잘 타지 않는 붉은 체리 색이며 기름을 먹인 듯 광이 나는 까닭에 거실의 모든 가구가 바닥에 비춰 보이는 것 같다. 벽의 한쪽에는 레코드와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아남 전축 세트가 거대한 스피커 두 개와 함께 비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텔레비전을 올린, 어둡다 못해 거의 검은 색의 장이 있다. 이 수납장 안에는 레코드들과 진품인지는 알 수 없는 고려청자, 그리고 호롱불 모양의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다. 20인치의 반짝거리는 회색 액정을 가리는 평면의 보안경, 그리고 그 밑 정중앙에 GoldStar 로고의 금빛이 선명한 텔레비전은 화면의 양옆에 스피커 두 개와 리모컨 보관함이 함께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거실의 한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있다. 이 낮은 테이블은 텔레비전을 지지하는 수납장과 같은 재질로 타원형이라기보다는 사각의 끝을 굴린 형태의 상판을 가지고 있다. 다리는 문어처럼 휘어져 바닥에 놓인다. 상판 위에는 흰색의 레이스 덮개가 깔려있고 그 위에 리모컨과 신문, 담배 그리고 재떨이가 놓여있다. 테이블 바로 앞,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위치의 벽에는 소파가 자리한다. 한껏 휘어진 체리 목으로 틀을 이루는 가죽 소파는 3인용의 긴 것과 1인용의 낱개가 있다. 가죽은 체리 목과 같은 색이며 군데군데 집혀 있는 같은 재질의 단추가 굴곡을 더한다. 소파의 모서리는 둥글며 허리는 들어가 있다. 틀은 소파의 가운데에 이르러 살짝 튀어나와 동그랗게 말린 익명의 나뭇가지를 모사한다. 

 3인용 소파의 오른쪽 맨 끝에는 한 노신사가 앉아 있다. 그의 얼굴은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찌푸린 인상을 지울 수 없어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나 보인다. 그는 손에 들린, 한글보다는 한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신문에 열중하고 있다. 감은 듯이 처진 눈의 시선은 신문의 활자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그는 내용에 따라 혀를 끌끌 차거나 한숨을 쉬곤 한다. 그는 담배를 태우고 싶은 듯 소파 앞 가운데 테이블을 힐끗보다가 이내 참으려는 듯 검지 끝에 침을 묻혀 신문을 넘긴다. 그의 옆, 소파 가운데 자리에는 8살에서 9살로 보이는 아이가 앉아 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늘 그러하듯 아이는 할아버지의 자세를 따라 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들린 책에 집중한다. 아이의 집중력은 역시 그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금세 바닥난다. 아이는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허리를 소파에 묻는다. 무릎을 접혔다 펴며 테이블의 휜 다리를 툭툭 차는 아이의 산만함에 할아버지는 신문을 접는다. 아이는 무릎 장난을 그만두고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마주치는 두 시선에 애정이 어려있다.

 

 “굿 모닝~”

 

 아이는 웃는 눈으로 말한다.

 할아버지는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본다. 몇 초의 침묵 후에 그는 묻는다.

 

 “그게 뭔 뜻이냐?”

 “영어로 ‘안녕하세요’라는 거에요.”

 

 아이는 읽던 책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작고 깨끗한 손이 가리킨 그곳에 꼬부라진 활자와 함께 눈코입이 그려진 노란 태양이 웃고 있다. 

 할아버지는 이유 모를 뿌듯함을 느낀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파란 하늘, 금발 머리와 초록 눈의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의 손자가 이물 없이 해사한 미소를 보낸다. 그는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이를 얼싸안고 얼굴을 비빈다. 까칠한 수염이 와 닿자 아이는 인상을 찡그린다. 아이를 놓아주자 아이는 책을 들고 방으로 종종 뛰어 들어간다. 

 그는 부엌으로 향한다. 아래위로 설치된 크림색 수납장이 ㄱ자로 배치된 부엌이다. 상판과 싱크대는 녹이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다. 그의 아내는 분주히 싱크대에서 채소를 씻는다. 스테인리스 상판에 도마를 놓고 씻은 채소를 송송 썬다. 냉장고의 위쪽, 아래쪽의 문을 열었다 닫는다. 2구의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국의 냄새가 벌써 구수하다. 화려한 난초 꽃무늬의 우아하면서도 실용적인 홈드레스를 입은 아내는 이제 거의 검은 빛이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쪽진 채, 국자를 들어 간을 본다. 그는 문득 아이에게서 느낀 뿌듯함, 그 형언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그녀와 공유하고 싶다. 

 

 “굿 모닝~”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눈을 돌리지도 않은 채 무심히 대답한다.

 

 “시래기 국이유.”

 

 

 

 

2. 김회장

 

최불암이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다 먹고나니 지갑에 돈이 없었다.

마침 다른 사람이 밥먹고 나가면서, "나 청량리파 두목이야."

주인은 돈을 받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이 나가면서 "나 청계천 보스야."

주인은 역시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최불암은 자신있게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나 양촌리 김 회장이야.”

 

 

 

 허연 국물에 순대와 내장, 채소가 둥둥 떠 있다. 들깨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그는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낀다. 새하얀 쌀밥이 담긴 은색의 그릇을 뒤집어 뚝배기 안으로 풍덩 입수시킨다. 시뻘건 양념을 푼다. 깍두기를 곁들여 씹는 것도 잊고 입안에 털어 넣는다. 검은 뚝배기 안에는 어느새 ㅇ자의 식은 국물만이 남는다. 그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담배를 꺼내 문다.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노란 플라스틱 재떨이에 담뱃재를 턴다. 배를 채우니 식당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은 손님들로 붐빈다. 나무 테이블마다 두어 명씩 앉아있다. 양복 차림의 샐러리맨,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 할 것 없이 국밥에 코를 박은 듯 쩝쩝대며 식사를 한다.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종업원 아줌마는 무표정으로 뚝배기를 턱 턱 내어주거나 젖은 행주로 빈 테이블을 훔치며 음식의 흔적이 남은 그릇을 양은 쟁반 위에 도로 턱 턱 담는다. 식사를 마친 사내들은 하나같이 윗옷 주머니에 처박아 두었던 구겨진 담배를 꺼내어 물고 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는다. 

 

 “파아~”

 

 포만감 때문인지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그는 조금 웃는다. 그러나 돌연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담배를 비벼끄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없다. 구석구석을 뒤져보아도 십 원짜리 하나 없다. 계산대를 본다. 머리가 반쯤 없는, 돋보기안경을 낀 사내가 계산대에서 장부를 넘기며 앉아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눈치를 보듯 다시 계산대를 바라본다. 덩치가 큰 손님이 그 앞에 서 있다. 가게 주인이 계산대 앞에 선 손님을 본다. 안경을 코에 걸치고 눈을 치켜뜬 그의 시선에 날이 서 있다. 손님은 그 서슬 퍼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맞춘다. 얼마간의 눈싸움 끝에 주인은 딴청부리듯 고개를 돌린다. 손님은 말한다.

 

 “나 청량리파 두목이야.”

 

 주인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떨리는 손을 미처 숨기지 못한다. 손님은 피식 웃더니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주인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남겨진다.

 빈 지갑에 당황했던 그는 두 번째 담배를 재떨이에 얹는다. 막막했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 아직 꺼지지 않은 담배가 재떨이에 걸쳐져 미세한 흰 내음을 뱉어낸다. 그는 그것을 들어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불현듯 서늘한 기운에 그는 다시 계산대를 본다. 가시지 않는 떨림을 진정시키고 있던 주인이 또 다른 손님을 마주한다. 스포츠머리의 이 손님은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달라붙는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었다. 드러난 양팔과 다리는 문신으로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눈 밑에 칼에 베인 것 같은 흉터도 보인다. 손님은 이미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는 주인에게 귀찮은 듯 말한다.

 

 “나 청계천 보스야.”

 

 주인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손님은 문을 열고 맨 팔과 맨다리를 드러낸 채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로 나가버린다.

 그는 두 번째 담배가 다 태워진 것도 모른 채 생각에 골똘히 잠긴다. 공포로 질린 주인의 얼굴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밖에는, 도무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는 이미 꺼진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 결연하게 일어선다. 계산대를 향해 걷는다. 2m 남짓 되는 짧은 거리가 그에게는 아득히 멀다. 걸음 하나하나에 만근의 돌덩이가 얹힌다.

 식당 주인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아직도 뭐가 남았습니까?’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미안한 생각에 마음이 약해지는 찰나, 그는 준비했던 말을 내뱉고 만다.

 

 “나 양촌리 김 회장이야.”   

 

 

 

 

 

3. 팔짱

 

최불암이랑 최진실이랑 극장에 갔다.

최불암이 팔짱껴도 되냐고 하자 최진실이 뺨을 때렸다.

잠시후 다시 최불암이 팔짱껴도 되냐고 하자 최진실이 또 뺨을 때렸다.

최불암이 다시 한 번 팔짱껴도 되냐고 하자 최진실은 뺨을 때린게 미안해서 된다고 했다.

 

최불암은 '어~ 춥다'라고 말하면서 혼자 팔짱을 꼈다.

 

 

 

 나는 이 남자와 잘해볼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런데도 이 11월의 토요일 이 남자와 피카디리 극장에서 만난 까닭은 재미있다고 소문이 난 영화 ‘미스터 맘마’를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또 굳이 덧붙이자면 달리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영화표 값도 내주고 영화가 끝나면 저녁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은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는데 이 남자, 영화관 직원이 표를 찢는다고 노발대발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다시 표를 사겠다고 우기는데 어찌나 무식해 보이던지. 겨우 말리고 앉아서 영화 좀 보려는데 어둡다고 퉁퉁거리고. 극장에 처음 와본 게 틀림없었다. 그런 데다 어찌나 엉큼한지 어둡다고 삐죽댈 때는 언제고 나에게 팔짱 껴도 되냐고 묻는 거다. 나는 당황해서 이 남자의 뺨을 살짝 때리고 말았다. 너무 심했나. 그래도 싫다는 의사는 전달됐겠지.

 스크린에 나오는 최민수는 핸섬하고 남자다웠다. 저런 남자는 왜 나에게 영화 보자고 하지 않는 걸까. 난 이렇게 상큼하고 귀여운데. 영화 속 여주인공 영주가 나랑 무척 닮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저기에 나오는 아기에게 왜 잘해주겠어. 최민수의 아들이니 그렇겠지. 옆자리에 앉은 남자, 우리 아빠보다 나이 들어 보이고 촌스러운 이 남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세상에. 그는 나를 슬며시 보더니 또 팔짱 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직도 못 알아들었나 싶어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또 때려버렸다. 이번엔 좀 세게 때린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떡해. 팔짱은커녕 팔꿈치가 스치는 것도 싫은걸.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원래는 저녁도 함께 먹어줄 작정이었는데 그럴 맘이 싹 사라졌다. 11월의 종로 거리는 썰렁했다. 이제 겨울이 오려나 보다. 겨울이니 나를 품에 꼬옥 품어줄 최민수 같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이 남자는, 다시 만나지 말아야지. 어떻게 집에 간다고 해야 하나. 오늘은 즐거웠어요. 영화 잘 봤어요. 나중에 봐요. 뭐, 적당한 말이야 있겠지. 그런데 이 남자, 나오자마자 별안간 또 팔짱 껴도 되냐고 묻는다. 벌겋게 부어오른 뺨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다. 다시 안 볼 사이인데 뭐. 또 한 번 뺨을 때릴 배짱도 없고 해서 나는 그냥 승낙해 버린다.

 

 “어~ 춥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혼자 팔짱을 꼈다. 

 

 

 

 

4. 탁구

 

63빌딩 옥상에서 두 사람이 탁구를 치고 있었다.

한 사람이 강 스매싱을 하자 탁구공은 63빌딩 아래 땅바닥에 떨어졌고, 구경하던 최불암이 계단으로 내려가 공을 주워 옥상까지 올라와 헐떡거리며 한 말은

"1 대 0"

※최불암 시리즈에 적힌 최불암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자기가 가장 재미있게 본 에피소드라고 한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지 않았는가. 고작 4년 지났을 뿐인데 우리나라에 돌아온 메달은 구리구리한 동색 두 개뿐이었다. 모두 알고 있지 않나?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대체 왜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을 못 딴 거란 말인가. 홈 경기라는 이점 때문에 금메달을 딴 거라며 수군거릴 중국 선수들을 생각하면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꺼메진다. 정말 비분강개에 천인공노할 일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한의 정서를 품고 지금 이 경기에 임한다. 물론 나는 현정화도, 유남규도 아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나는 상대방을 덩야핑이라 여기며 승리욕을 돋군다. 왜 경기가 63빌딩 옥상에서 이루어지게 됐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63빌딩, 금세기 최고층의 마천루 아닌가. 이야말로 발전의 상징, 서울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 경기의 승자는 발전의 상징, 서울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나는 것이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높다란 건물 위에서 나와 상대는 직사각형의 초록 판을 펼쳐 놓고 백색의 플라스틱 공을 날리며 불꽃 튀는 대결을 시작했다. 상대는 나의 서비스를 가볍게 받아낸다. 보통이 아니군. 랠리는 지겹도록 이어진다. 우리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의 방심이라도 포착되면 주저하지 않고 나의 비기를 날리리라. 그러나 랠리는 계속된다. 공이 튀기는 리듬이 일정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에 나는 기계적으로 라켓을 움직이며 조금 졸리다고 생각한다. 해가 넘어가고 있다. 노을을 받은 한강 물이 반짝인다. 유람선이 지나간다. 유람선의 사람들은 입을 헤에 벌려 경기를 구경하겠지. 멋있겠지. 문득 저 사람들에게 발전의 상징이자 서울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의 면모를 선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라켓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오호라! 지금! 빈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강 스매시를 날린다. 탁구 경기지만 나는 헐떡이는 숨과 함께 소리를 내뱉는다.  

 ‘불꽃 슛—!’ 

 불꽃이 이글거리는 나의 슛은 상대의 필드에 튀었다가, 공중으로 솟는다. 불꽃 슛의 위압감에 상대는 감히 백색 구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한다. 공중으로 솟은 불꽃은 한참을 오르다 떨어지는데… 아뿔싸, 아득한 옥상의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여분의 공은 없다. 불꽃 슛은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승리의 쾌감에 취해 거만한 눈을 내리깐다. 

 경기를 구경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불꽃이 추락한 옥상의 난간으로 달려간다. 저 아저씨는 이 경기를 준비할 때부터 우리 주변에서 서성대던 사람이다. 아저씨들 오지랖이야 익히 아는 바이지 않은가. 나도 상대도 이 아저씨를 종일 무료 해하는 한량 정도로 여기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군데군데 섞인 흰머리에 찡그린 표정, 심지어 웃을 때도 그 얼굴은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중년의 남자들이 보통 그런 얼굴이지 않은가. 워낙 존재감이 없는 양반이었다. 아저씨는 지루한 랠리를 바라보며 하품을 하거나 담배를 꼬나물곤 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갑자기 이목을 끄는 것이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불꽃의 궤적이 사그라질 때까지 공을 주시한다. 백색 구에 시선을 떼지 않던 그는 불현듯 쭈그리고 앉아 신발 끈을 고쳐 매더니 계단으로 달려간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 그가 사라진 계단 비상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이 경기는 내가 이겼다. 나는 상대와 악수한다. 패배를 묵묵히 받아들인 상대의 손은 그새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었다. 도와주는 스태프나 팀이 있는 경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함께 탁구대를 접어 옥상의 구석으로 옮겨놓는다. 라켓을 챙겨 넣은 니코보코 스포츠 가방을 든다. 아아, 유람선의 관객들에겐 이미 난 최고의 탁구 스타, 그것도 발전의 상징, 서울의 영혼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선수가 되어있겠지. 마지막으로 나는 타는 석양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찔끔 흘린다. 이제 얼른 목욕탕에 가고 싶다. 오늘만은 문신한 깍두기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자신이 있다. 천근만근의 몸을 움직여 내려가려는 찰나, 아까 그 아저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으로 올라온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길 수 없어 두 배가 된 동공으로 아저씨를 바라본다. 땀으로 범벅이 된 눈을 채 뜨지도 못한 채 그는 오래도록 준비한 말을 꺼낸다.

 

 “1 대 0!”

 

 

 

 

5. 스머프

 

최불암이 독수리 오형제를 보기 위해 급히 논에서 돌아와 TV를 켰는데 엉뚱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금동이에게 물어보니 독수리 오형제는 어제 끝났고 오늘부터는 개구장이 스머프가 방송된다고 했다. 최불암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며 근심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스머프가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내 이름은 금동이다. 김금동. 우리 집은 양촌리이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보고 김 회장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농촌 조합 회장을 하셨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큰일이 생겼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랑 이야기한다. 그런 일 말고 조금 작은 일이 생겼을 땐 보통 어머니가 나서신다. 복길이네 할머니랑 어머니, 부녀회장 아줌마, 쌍봉댁 아줌마도 우리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많다.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잘해서 효자라고 소문났다. 어머니는 가끔 할머니 때문에 머리에 흰 띠를 쓰고 누울 때도 있지만 보통은 둘이 잘 지내신다. 할머니는 나한테 가끔 사탕도 주고, 용돈도 주신다. 얼마 전에는 서커스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있었더니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서커스 보라고 오백 원도 주시고 그냥 용돈도 더 주셨다.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우리 첫째 형님은 군청에 다니는데 김 계장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인이 꿈이라 가끔 시도 쓰신다. 국문학과를 졸업해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우리 동네는 거의 다 농사를 짓기 때문에 대학 나온 우리 형님은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통한다. 둘째 형님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한번은 서울이나 부산에 가서 돈 많이 벌어와 나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일 때문에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속상해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다 해결되어서 농사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나는 형수님들도 있고 조카들도 있다. 조카들 이름은 영남이랑 수남이다. 수남이는 완전 아기이고 영남이는 내가 잘 놀아주는데 가끔 귀찮게 굴 때는 형수님 몰래 꿀밤을 먹이기도 한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내가 다 가르쳐주어야 한다. 나는 누님들도 셋이나 있지만, 지금은 다 시집가서 얼굴을 본 지 오래다. 아버지는 누님들을 얘기할 때 출가외인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님들을 앞으로도 자주 보기 힘들다는 뜻 같았다. 

 우리 가족 소개는 여기까지다. 내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나는 우리 집 막내아들 금동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양아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다. 원래 부모님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하나는 내 원래 이름이 김상호였다는 것. 이 집에 오기 전까지는 집이 없었다. 나는 그냥 온종일 이리로 저리로 걸었다. 누가 불쌍하다고 밥을 주면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다 우리 아버지를 만나게 됐고 여기 양촌리에 오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던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넌 이제 내 아들이다.’라고. 그때부터 나는 이 집 식구가 됐다. 

 우리 아버지는 가만히 계시면 화난 것 같고 가끔 성이 나면 너무 무섭지만 나는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아버지가 진짜 나를 낳은 아버지였다면 좋았을 텐데… 에이, 이런 생각은 그만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배가 시리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조금 눈물이 날 것 같다. 

 아버지와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다. 봄에는 모내기하고, 여름에는 논 관리하고, 가을에는 추수하고. 농촌의 하루는 바쁘다. 겨울에도 아버지는 농번기에 미루었던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그래도 우리는 하루에 한 번은 같이 시간을 보낸다. 

 “슈파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 소리~” 

 저녁 5시, 7번에서 하는 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곡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논에서 바쁘게 일하시다가도 급하게 돌아오신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나는 아버지가 나하고 같이 테레비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테레비를 본다. 보통 이야기는 이런 식이다.

 

 “아버지는 건이가 좋아요, 혁이가 좋아요?”

 “난 건이.”

 “왜요?”

 “건이가 더 세니까.”

 “난 그래도 혁이가 더 좋아요.”

 “……”

 “왜냐면요.”

 “얘, 시끄럽다 테레비 좀 보자.”

 

 우리는 오형제가 힘을 합쳐 알렉터를 쳐부수는 것까지 구경한다. 그러면 보통 한 회가 끝난다. 내일은 또 독수리 오형제 앞에 무슨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일까! 아버지와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오늘의 감상을 나눈다. 

 

 “아버지, 수나 이쁘지 않아요?”

 “음, 그런데 걘 백조 아니냐? 그런데 왜 독수리 오형제지?”

 “아버지도 참, 건이가 독수리고, 건이가 대장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죠!”

 

 우리는 깔깔대면서 함께 이야기한다. 내가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저녁 테레비가 시작되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 나는 4시 반부터 테레비를 켰다. 회색 바둑판 바탕에 동그란 원이 알록달록 빛나고 있는 모양이 나왔다. 움직이지도 않는 오색의 동그라미가 지겨워서 나는 테레비를 껐다. 그러다가 못 참고 또 켰더니 어머니가 전기세 나온다며 뭐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또 꾸중을 들을까 꾹 참았다가 5시가 되자마자 다이얼을 드르륵 돌려 테레비를 켰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랄랄라~”

 슈파 슈파 슈파 대신 처음 듣는 노래가 나왔다. 나는 주제가가 나오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새 만화영화였다. 빨간색 땡땡이 버섯집에서 사는 파란 사람들이 나왔다. 살은 파란데 모자랑 옷은 다 하얀색이었다. 주제가와 함께 나온 제목은 ‘개구장이 스머프’였다. 나는 신이 났다. 이렇게 파란 사람이 많으니 아버지와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테레비 화면과 아버지가 들어오실 미닫이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논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문을 드르륵 열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들어서자마자 화면에 눈을 고정하셨다. 예상과 다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

 “어제 독수리 오형제는 끝났고 오늘부턴 개구장이 스머프가 방송된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시 미닫이문을 열어 밖으로 뛰쳐나가셨다. 왠지 모르는 서러운 마음에 나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나는 목 끝까지 나온 울음을 꾹 참았다. 울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을 걸 알고 있다. 테레비를 껐다.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논과 밭 사이의 둑길,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 곳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버지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그곳으로 가서 먼 산을 바라보곤 한다. 나는 아버지 모르게 둑길의 밑에 숨어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근심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계셨다.

 

 “스머프가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누가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웃겨진건지. 덜 웃겨진건지

그런데 이렇게 자세히. 묘사해보았다는 것 자체가. 좋고. 부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다시 본다는 것에 관해서.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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